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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여기저기

【08.11.09(일)】가을이 머무는 창덕궁 후원

 

창덕궁(昌德宮)

 

창덕궁은 태종5년*1405)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번재로 지어진 궁궐이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종2년(1865)까지 폐허로 방치되었으나, 창덕궁은 광해군(1608~1623)때 곧바로 재건되어 가장 오랫동안 실질적인 조선의 으뜸 궁궐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된 데 비해,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긍의 건물들과 정자들은 산의 지형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점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뛰어난 점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12년(1412) 처음 지어졌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건 되었다.

'돈화'는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 시킨다는 뜻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정문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진선문(進善門) 

 

 

 

 

'금천교'

금천교는 태종 11년(1411) 조성된 서울에 남아있는 옛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전통적으로 궁궐에 들어갈 때는 꼭 시냇물을 건너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시냇물이 풍수설에 의한 명당수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궁궐지킴이 '서수(瑞獸)' 

우리나라 궁성을 지키고 있는 이들 조각들은 얼핏 보기에도 엄숙함이나 경건함, 장중함 또는 세밀함 등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돌을 떡 주물르듯 만져온 민족이고 정밀하기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 우리다. 그런데 그런 민족의 궁궐을 다소 촌스럽고 허술하게 생긴 궁궐 지킴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이나 석가탑 다보탑 같은 빼어난 석조 기술을 가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허술함이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어딘지 모르게 껴안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친근감이 생긴다. 대충 처리한 듯한 돌 속에 따뜻한 인정이 녹아 들어있는 듯이 보인다. 철 모르는 어린 아이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가서 만질 수 있는 것은 그런 친숙함이 어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편으로 이들을 세세히 뜯어 보면 '아!'하는 찬탄을 하게 된다. 외국의 엄숙하고 장대한 석조물들은 좌우대칭으로 도열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궁성 지킴이들은 어떤 것은 궁궐의 지붕을 바라보고 있고, 어떤 것은 돌다리 밑을 살피고 있고, 어떤 것은 담장의 구석진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위치도 좌우 대칭을 과감히 탈피하여 석교의 아래나 계단의 한 구석에 과감히 포진되어 있다. 허술한 듯한 인상과는 달리 빈틈이 없이 궁궐을 지켜내고 있는 철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인정문'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인정전과 함께 세워졌으며 현재의 것은 화재로 불탄 것을 순조 3년(1803)에 재건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으뜸되는 건물이다.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왕의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던 의식의 공간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조성할 때 세워진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1년(1609)에 복원되었다.

현재의 인정전은 순조 3년(1803)의 화재로 그 이듬해에 재건된 것이다. 또한 순종 1년(1908) 내부의 일부가 서양식으로 고쳐졌다.

 

 

'선정전(善政殿)'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다. '선정'이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다.

선정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조 7녕(1461)이다. 임진왜란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타 인조 25년(1647)에 재건되었다.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흥복헌'

1910년 한일합방늑약인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는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곳이고, 1926년 순종황제께서 붕어하신 곳이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주합루'

부용정 맞은편 언덕 위에 자리잡은 2층집은 주합루로 정조 즉위년(1776)에 지어 졌다.

원래 1층에는 규장각이 있었다.

주합루와 규장각은 학문연구 기관인 동시에 임금이 지은 글이나 글씨 및 임금의 초상화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현재 걸려 있는 주합루의 현판은 정조가 친히 쓴 글씨이다.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연못이다.

사각형의 연못은 땅을 의미하며,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부용정은 사방으로 지붕이 돌출된 열 십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불로문(不老門)'

'불로'란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이 문은 화감암 한개로 쪼아 만든것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 한다. 선조들의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계 건축가들도 인정하는 기술이라 한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

애련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고,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세워졌다.

'애련'이란 군자의 덕으로 상징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연경당'

원래 이 집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조 28년(1828)에 지어 졌다.

이 집은 대궐에 있으면서도 단청이 되어 있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로 남녀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 집을 연상 시킨다.

 

 

 

 

 

 

 

 

 

 

 

 

 

 

 

 

 

 

 

 

 

 

 

 

 

 

 

 

 

 

 

 

 

 

 

 

 

 

 

 

 

 

 

 

 

성북구민회관 진입로의 '메타세콰이어길' 

 

 

 

 

 

 

 

 

 

 

 

북악스카이웨이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