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덕에 산행을 접고 카메라 둘러메고 고궁으로 달려간다. 작년은 건너뗬으니 2년만의 발걸음이다.
11시 관람시간을 맞춰 갔는데 내게 주어진 주차공간은 없다. 30여분을 기다렸다 주차를 하고 12시 후원 특별관람표를 끊고 들어간다.
먼저 기본코스를 돌아보고 시간맞춰 후원으로... 오늘은 운 좋게도 후원관람이 자유관람을 할 수 있는 마지막날이라 한다.
그동안은 늘 가이드를 따라 시간과 동선을 같이해야 하다보니 쫒기 듯 다녔는데 오늘은 시간도 동선도 내 맘데로다.
'왕에게 바른 말을 아뢰어 국정을 올바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깃든 진선문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위압적이면서도 자상한, 합리적인 자유, 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인정전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소실됐으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중건했다.
창덕궁은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거쳐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해의 아픔을 간직한 창덕궁
임진왜란 때 불탄 창덕궁을 다시 짓고 그 바탕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왕은 그의 조카인 능양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1623년 3월13일 밤 창과 칼을 움켜 쥔 군사들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 모였다. 이들은 능양군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궁궐 안에는 이미 능양군의 군대와 내통한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돈화문을 열어주었다.
군사들이 밀물처럼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돌보던 선정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 등 궁궐 안 대부분 건물은 화마에 휩싸였다.
왕은 그 무렵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밤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능양군의 군대가 궁궐을 휩쓸고 다니는 사이 왕은 궁궐을 버리고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해 있었다.
주인이 버리고 간 창덕궁은 이미 새로운 주인인 능양군의 손에 넘어갔다. 능양군은 조선 16대 왕, 인조가 됐다.
능양군이 창덕궁을 장악하고 스스로 새 임금이 된 그 해까지 광해군이 왕으로 산 세월은 15년. 그 세월 동안 광해군의 새로운 조선 건설의 꿈을 함께 한 곳이 창덕궁이었다
사실 광해군은 능양군이 군사를 일으켜 자신을 왕의 자리에서 내몰려고 하는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 전에도 자신의 자리를 노린 여러 역모 사건이 있었고 이번 일도 사전에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전에 그랬듯이 사전에 역모를 밝혀 관련된 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내지 않았다. 역모 당일 밤이 되도록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생각하건대 광해군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최후의 만찬을 즐겼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정파 간 세력 싸움에서 무기력하게 희생된 것은 아닐까?
낙선재
1847년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져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낙선재 앞마당엔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는데 올핸 홍시도 주렁주렁 열려있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창덕궁 후원은 왕실의 정원이었다. 왕의 휴식 공간이자 왕실의 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을 격려하고자 술과 음식을 내고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왕은 후원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정자나 건물을 지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100여 개나 됐다고 한다.
후원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부용지와 주합루다. 약 300평 정도 되는 연못 주변에 몇 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연못 바로 옆 작은 건물은 만개한 연꽃을 닮았다고 하는 부용정이다.
부용정 맞은편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 주합루이다. 주합루는 아래로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으며 좌우로 서향각과 천석정 등의 건물을 거느렸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와서 정문인 어수문을 통과하면 부용지가 나온다. 주합루는 부용지 일대의 건물을 거느리고 풍경의 중심점이 된다.
부용정과 주합루 사이 연못 앞에 있는 건물은 영화당으로 그 앞뜰인 춘당대에서 열리는 문무의 과거를 임금이 직접 주관하기도 했던 곳이다.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연못이다. 사각형의 연못은 땅을 의미하며,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부용정은 사방으로 지붕이 돌출된 열 십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그 해에 완공됐다. 정조는 붕당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품은 군주다.
붕당의 정치싸움에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혁신하려는 정조의 뜻이 담긴 곳이 주합루였다. 주합루에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이 있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 잠깐 설립됐다가 폐지 된 적이 있었는데 정조는 즉위년에 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각은 궁궐 안팎 여러 곳에 설치 됐으며 주합루에는 어필과 인장, 도서 등을 보관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기능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고 규장각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발굴 육성했다. 그들이 정조의 친위세력이 됐던 것이다.
연경당
원래 이 집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조 28년(1828)에 지어 졌다.
애련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고,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세워졌다.
'애련'이란 군자의 덕으로 상징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은 연못 옆 정자에 '애련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장희빈의 시샘으로 인현왕후가 궁 밖으로 축출된 후 쓸쓸해진 어느날 밤 숙종이 후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 빛을 따라가 보니
그 곳에서는 무술이가 인현왕후의 생신을 홀로 기억하고 있느게 아닌가. 그 후로 숙종과 무술이는 자주 이곳에 들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왕실의 비밀 정원, 창덕궁 후원...
어느 숲의 가을보다 더 깊고 수려한 가을이 내려앉은 어느 정자에 앉으면 광해와 능양의 이야기도 정조의 굳은 마음도 다 들릴 것만 같다.
아주 오래된 숲은 수백 번의 가을을 맞이하고 보낸 늙은 나무들이 옛날 이야기하듯 속삭일 것 같다.
정조의 글귀가 남아 있는 존덕정
옥류천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 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론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곡선을 그리며 굽어 돌아가는 물길 한 쪽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창경궁으로
통명전의 뒷 모습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20세에 요절, 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둘째아들로 작은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 어른으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인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게 된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다.
좀 청승맞긴 하지만 배가 고프니...
아직 가을은 궁궐에 머문채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오늘이 立冬이니 이제 이제 가을도 앤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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