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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등산정보

북한산과 삼각산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야

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이 작품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대항해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이 전란후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고국을 떠나면서 느끼는 비분강개한 심정을 노래한 시조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산의 이름은 삼각산이었다.

대부분의 서울시민과 경기일원 주민도 삼각산이라고 불렀으나 70년대에 들어 혼용해 부르다 1983년 삼각산과 도봉산을 함께 묶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부터 북한산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 등산객에게 물어도 북한산에 간다 하지 삼각산에 간다 하는 이는 드물다.


관련해서 예전에 서울신문과 파이낸스투데이에 실린 내용을 인용 해 본다

 

(이하 서울신문)
삼각산은 고려 성종(993년)때에 이미 '삼각산'으로 정착되어 불렸다. 그 이전 삼국시대에는 ‘부아악’이라고 했다.

삼각산의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문헌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이다. ‘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의 옛땅입니다’ 라고 서희가 고려 성종에게 아뢴 말에서이다.

또 목종9년(1006년)기사에도 ‘목종이 숭교사에 있던 현종을 삼각산 신혈사로 옮겨 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뿐만아니라 고려 숙종때 만든 삼각산 중흥사반자 명문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의 비문, 충혜왕5년(1344년)에 제조한 중흥사청동누은향로의 명문들에서 한결같이 삼각산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조선시대에 삼각산이란 이름은 확고부동하게 정착된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역대 지리서와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선비의 문집과 기행문에서 모두 삼각산으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본명이 돼버린 ‘북한산’은 어떤 역사적 근거로하여 이름붙은 것일까.

'비류와 온조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라는 삼국사기 백제기사의 ‘한산’이 그 효시가 된다.

 

그러나 이 한산은 특정한 산이름이 아니라, 백제 건국 당시의 한강유역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이 여러 사학자들의 설명이다.

따라서 북한산은 한강이북 지역으로, 남한산은 한강이남 지역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제 건국초에 고구려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남하한 비류와 온조등의 백제 건국집단이 한강유역 일대를 ‘한산’이라 일컫기 시작한 것으로 엄밀히 말해서 삼국사기의 북한산은 곧 ‘한강이북의 한산지역’이란 의미의 말이다.


서울시가 펴낸 ‘서울의 산’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한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보이며, 이는 한강·한수·한양·한성 등의 지명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옛이름은 한산·북한산·북한산성·북한성·한양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은 처음부터 산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서울지방 옛이름인 한산의 북쪽지역을 가리킨 지명에서 비롯된것임을 알 수 있다.

 

(이하 파이낸스투데이)

서울의 진산 삼각산은 어떤 연유로 이름 지어졌을까.

흔히 알려져 있듯, 백운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을 말함일까? 이런 이야기의 선결과제로 삼각산은 서울의 뒷산일지, 개성의 앞산일지를 논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삼각산의 이름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서울대 국문과의 이숭녕박사. '북한산 역사지리'의 김윤우 선생님 그리고 '북한산1,2,3'의 민경길 교수 등 학계 인사와 박인식 등 많은 산악인들이 입장을 개진해 왔고 하여 더이상 새로운 이론이 있을 수 없겠다. 그들은 한결같이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그 옛날 삼각산을 명명한 이들의 '관점'. 그러니까 도대체 누가 삼각산을 처음 불렀을까 라는, Viewpoint가 어딘지를 살피지 못한 오류를 갖고 있다.

처음 삼각산이라 부른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일커러 삼각산이라고 지칭했을까?
'삼각산'이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 때 처음으로 등장한 즉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삼각산은 서울의 뒷산이 아니라 고려 수도인 개성의 앞산이라는 거 말이다.


그렇다면 개성에서는 삼각산이 어떻게 보일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사진은 파주 공릉천에서 찍은 북한산의 모습이다.

북한산에 대해 조금만 아는 이라면 저 봉우리가 각각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파주와 개성은 북한산과는 거의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파주에서 보는거나 개성에서 보는 북한산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이 사진은 개성에서 찍은 북한산의 모습이다.

1990년 전후 남북화해 분위기에서 고은 시인과 유홍준 교수가 함께 북한 일대를 돌아본 중앙일보 김형수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1998년 7월 24일 게재)

개성 사람들은 3개의 뿔처럼 보이는 인수봉과 백운봉, 노적봉의 모습을 보고 三角山이라 불렀으리라.

분명한것은 만경대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사에는 노적봉을 염초봉이라 했는데 그것은 기자의 오류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자.

먼저 북한산에서 북한산을 바라보자.

 

남쪽방향인 의상봉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여기에선 인수봉이 보이지 않는다.

 

 

 

 

 

문수봉에서 바라보면 비로소 인수봉이 모습을 들어낸다.

 

 

 

 

 

 

동장대쪽에서 바라보니 노적봉과 만경대, 인수봉이 山자를 이루고 있으나 주봉인 백운대는 만경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상장능선에서 바라보면 만경대가 인수봉과 백운대에 가려 보이지 않고 대신 우측으로 염초봉이 보이지만 뿔로 보기엔 약하다.

 

 

 

 

다음은 북한산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자.

 

먼저 동쪽에서 북한산을 바라본 모습은 어떠할까

불암산에서 바라보면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이 뚜렷하나 만경대를 뿔로 보기엔 좀 부족해 보인다.

 

 

 

 

 

북한산과 한참 멀리 떨어진 천마산에서 보는 북한산은 불암산, 수락산, 천마산, 철마산 등 동쪽 방향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젠 서쪽에서 바라보자

노고산 한북정맥길에서 바라본 모습은 뿔들이 많이 보인다

 

 

 

 

 

그럼 남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어떠할까

백악산에서 바라보니 여기에선 아예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은 보이지 않고 보현봉이 우뚝해 보인다.

즉 한양 도성안(4대문안)에서는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해서 옛 도성안 백성들은 한양의 진산을 보현봉으로 여겼다 한다.

 

 

 

 

남산에 올라 바라봐야 비로소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 그 모습을 들어낸다.

그러나 여기서도 돋보이는건 보현봉이다.

 

 

 

 

 

마지막으로 북쪽에서 바라보자

고령산에서 바라본 모습은 인수봉, 백운대, 염초봉이 山자를 이루지만 염초봉을 뿔로 보이기엔 약하다.

 

 

 

 

 

인수봉, 백운대, 노적봉

 

북한산이 맞느냐 삼각산이 맞느냐 하는 논쟁은 불필요 해 보인다.

북한산은 지명에서 비롯 된 이름이고, 삼각산은 형상을 보고 붙혀진 이름이니 둘 다 맞는 말이다.

다만 북한산을 대표하는게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린점에 대해선 동의할 수 있으나

왜 삼각산인가 하는 물음에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 정답인양 말하는 학계와 산악인들의 의견에는 물음표를 던진다.
역사적 사실을 보나 동서남북 각 방향에서 북한산의 모습들을 살펴 본 바로는 북한산은 고려인의 시각, 즉 개성인의 시각에서 보는게 좀 더 설득력이 있지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