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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여기저기

【07.11.18(일)】창덕궁...세계문화유산의 으뜸이어라!

 

 

 

초겨울의 후원길을 걷다

 

 

 

 

   

 

 

창덕궁(昌德宮)

 

창덕궁은 태종5년(1405)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번째로 지어진 조선의 궁궐이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종 2년(1865)까지 폐허로 방치되었으나,

창덕궁은 광해군(1608~1623) 때 곧바로 재건되어 가장 오랫동안 실질적인 조선의 으뜸 궁궐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된 데 비해.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의 건물들과 정자들은 산의 지형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점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뛰어난 점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 안내자료>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1412) 처음 지어졌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 의정문 중 가장 오래되었다.

'돈화'는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킨다는 뜻이다.

 

 

은행잎은 모두 떨어지고 은행만 주렁주렁

 

 

 

 

 

 건물 처마밑이나 천정에 설치되어 있는 그물망을 '부시'라 한다.

이는 궁궐이 세워진때부터 설치된 것으로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다보면 구렁이나 뱀들이 오를 수 있어 이를 사전에 차단하고,

또한 새들의 배설물로 인한 여러 피해를 막기위한 선조들의 지혜이기도 하다.

 

 

 

 '진선문(進善門)'

 

 

 

 

 

 

 

 

 

 

 

 

 

 

 

 

 

 

 

 

 

 

 

'금천교'

금천교는 태종 11년(1411) 조성된 서울에 남아있는 옛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전통적으로 궁궐에 들어갈 때는 꼭 시냇물을 건너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시냇물이 풍수설에 의한

명당수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궁궐지킴이 '서수(瑞獸)' 

우리나라 궁성을 지키고 있는 이들 조각들은 얼핏 보기에도 엄숙함이나 경건함, 장중함 또는 세밀함 등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돌을 떡 주물르듯 만져온 민족이고 정밀하기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 우리다.

그런데 그런 민족의 궁궐을 다소 촌스럽고 허술하게 생긴 궁궐 지킴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이나 석가탑 다보탑 같은 빼어난 석조 기술을 가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허술함이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어딘지 모르게 껴안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친근감이 생긴다.

대충 처리한 듯한 돌 속에 따뜻한 인정이 녹아 들어있는 듯이 보인다.

철 모르는 어린 아이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가서 만질 수 있는 것은 그런 친숙함이 어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편으로 이들을 세세히 뜯어 보면 '아!'하는 찬탄을 하게 된다.

외국의 엄숙하고 장대한 석조물들은 좌우대칭으로 도열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궁성 지킴이들은 어떤 것은 궁궐의 지붕을 바라보고 있고, 어떤 것은 돌다리 밑을 살피고 있고,

어떤 것은 담장의 구석진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위치도 좌우 대칭을 과감히 탈피하여 석교의 아래나 계단의 한 구석에 과감히 포진되어 있다.

허술한 듯한 인상과는 달리 빈틈이 없이 궁궐을 지켜내고 있는 철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인정문'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인정전과 함께 세워졌으며 현재의 것은 화재로 불탄 것을 순조 3년(1803)에 재건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으뜸되는 건물이다.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왕의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던 의식의 공간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조성할 때 세워진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1년(1609)에 복원되었다.

현재의 인정전은 순조 3년(1803)의 화재로 그 이듬해에 재건된 것이다. 또한 순종 1년(1908) 내부의 일부가 서양식으로 고쳐졌다.

 

 

 '품계석'

맨뒤 正9品부터 맨앞 正1品까지 양쪽에 세워져 있다

 

 

 

 

인정전 내부 모습

 

 

 

 

 

 

 

 

 

 

 

 

 

 

 

 

 

 

 

 

 

 

 

 

 

 

 

 

 

 

 

 

 

 

 

 

 

 

 '선정문과 선정전(善政殿)'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다. '선정'이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다.

선정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조 7녕(1461)이다. 임진왜란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타 인조 25년(1647)에 재건되었다.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성정각'

궁궐의 동쪽은 예로부터 왕세자의 공간이었다. 희정당 동남쪽에 있는 성정각은 주연이 열리는 세자의 교육장으로,

주연은 세자의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에서 하루 세 차례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것으로

아침에 하는 조강, 점심이후 낮 시간에 하는 주강, 저녁공부인 석강으로 이루어졌다.

 

 

 '희정당 남행각'

처음에는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임금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일제감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지어 졌다.

이때 내무의 일부는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대조전(大造殿)'

왕비의 침전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내부는 일부 서양식으로 꾸며 졌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침실...침대와 탁자

 

 

 

 

 

 대조전과 희정당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측 건물이 '희정당'

 

 

 

 

 

 희정당 내부는 일부 서양식으로 꾸며 졌다

 

 

 

 

 

'흥복헌'

1910년 한일합방늑약인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는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곳이고, 1926년 순종황제께서 붕어하신 곳이다.

 

 

 

 

  '수랏간'

수랏간도 서양식으로 꾸며 졌다 

 

 

 

 

 '경훈각'

  대조전 뒤쪽에 있는 건물이 경훈각이다. 경훈각은 대조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왕과 왕비의 또다른 생활공간이다.

지금은 일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이층 건물로서 일층은 경훈각 이층은 징광루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1917년 화재로 타버린 후 1층으로 만 만들어 버렸다.

 경훈각 뒷뜰은 정원을 가꾸어 놓아 왕비나 궁녀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낙선재(樂善齋)'

헌종 13년(1847) 임금의 거처로 지어 졌다. 낙선재는 헌종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책을 볼 수 있게 지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대궐에 있는 집이면서도 사치스러움을 경계하여 단청을 하지 않았다.

또한, 낙선재는 창덕궁에서 가장 최근까지 사용되었던 건물로 영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평소 홍시를 좋아하는 고종임금을  위해 외부에서 감나무를 갖다 심었다 하여 고종홍시라고도 한다.

 

 

 

 

 

 낙선재로 들어가는 대문

낙선재는 특이하게 대문이 중앙에 있지않고 왼쪽편에 있는데 이는 집안을 들어서면서 정면에 있는 정자를 바라보고

마음을 즐겁게 하고 집안에 들어 오라는 의도가 있다 한다.

장락문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연못이다.

사각형의 연못은 땅을 의미하며,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부용정은 사방으로 지붕이 돌출된 열 십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합루'

부용정 맞은편 언덕 위에 자리잡은 2층집은 주합루로 정조 즉위년(1776)에 지어 졌다.

원래 1층에는 규장각이 있었다.

주합루와 규장각은 학문연구 기관인 동시에 임금이 지은 글이나 글씨 및 임금의 초상화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현재 걸려 있는 주합루의 현판은 정조가 친히 쓴 글씨이다.

 

 

 

 

 

 

 

 

 

 

 

 

 

 

 

 

 

 

 

 

 '영화당'

부용정과 주합루 사이 연못 앞에 있는 건물은 영화당으로 그 앞뜰인 춘당대에서 열리는 문무의 과거를 임금이 직접 주관하기도 했던 곳이다.

 

 

 

 

 

 

 

 

 

 

 

 

 

 

 

 담넘어는 '창경궁'

 

 

 

 

 

 

 

 

 

 

 

'불로문(不老門)'

'불로'란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이 문은 화감암 한개로 쪼아 만든것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 한다. 선조들의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계 건축가들도 인정하는 기술이라 한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

애련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고,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세워졌다.

'애련'이란 군자의 덕으로 상징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연경당'

원래 이 집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조 28년(1828)에 지어 졌다.

이 집은 대궐에 있으면서도 단청이 되어 있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로 남녀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 집을 연상 시킨다.

 

 

 

 

 

 

 

 

 

 수백년의 수령을 갖고 있는 나무로 가운데는 아직도 살아있고 왕성한 줄기를 내뻗고 있다.

 

 

 

 

 

 

 

 

 

 

 

  '향나무'

1830년 무렵에 그려진 동궐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령이 7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12m, 뿌리부분 둘레 5.9m로 여러 방향으로 뻗어있는 가지는 뒤틀리며 자라있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되는데, 이곳에 향나무가 심겨진 것은 동측 선원전이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