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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지리산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변천사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에는 약1천년전부터 성모사라는 사당이 자리를 지켜왔으며, 그안에는 성모석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또한 천왕봉에서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노고단에는 남악사가 있으니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숭상된 영원한 우리민족의 산이다.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제석봉(1806m), 연하봉(1730m), 촛대봉(1703m), 영신봉(1651m), 칠선봉(1576m), 덕평봉(1522m), 명선봉(1596m), 토끼봉(1534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만복대(1433m), 고리봉(1304m), 바래봉(1165m)이 있으며,
천왕봉의 동쪽에는 중봉(1875m), 하봉(1781m), 써리봉(1640m), 웅석봉(1099m)이 있다.
이 가운데 천왕봉에서 노고단 사이의 산행을 종주산행이라 말하며, 동쪽끝의 웅석봉에서 서쪽끝의 바래봉까지의 산행을 태극종주산행이라 부른다

 

지난 58년 이후 60년대 초반에 천왕봉에 올랐던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도리'를 먼저 해야 했다.
"천왕봉에 태극기를 게양해 두고, 그곳에 오른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이어 부동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다."
부산 대륙산악회를 오랫동안 이끈 대표적인 지역산악인 곽수웅의 증언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당시 천왕봉에선 그 의식을 반드시 치르도록 요구하는 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공은 진주(晋州) 사람으로 천왕봉에 상주하던 김순용(金順龍) 노인이었다.
1948년 여순반란에 이어 지리산이 빨치산과 군경토벌군의 격전장으로 변하면서 일반인은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
산악인들에게 천왕봉이 개방된 것은 무려 10년만인 57년 여름부터였다.
이 때 재빨리 천왕봉을 찾았던 김 노인은 빨치산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토굴식 지하주거지를 발견, 그 주인으로 눌러앉았다.
이렇게 하여 천왕봉 최초의 토굴식 산장이 생겨났다.

이 지하산장은 엎드려 들어가 겨우 앉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온돌식으로 난방이 가능했다. 또 내부가 꽤나 넓어 가운데 칸을 질러 방이 둘이었는데, 한쪽은 30명, 또 한쪽은 2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사용료는 일반인 50환, 학생 30환이었고, 주인 김 노인이 건빵 마른오징어 소주 담배 성냥 등을 갖다 놓고 팔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부르지 않으면 건빵 한 봉지 사먹을 수 없었으니까' 김 노인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한 해 통틀어 천왕봉에 등산 목적으로 오르는 이들이 150명 안팎에 불과했다.
또 이들은 어렵게 천왕봉에 오르기가 바쁘게 서둘러 하산을 했으므로 토굴산장의 존재를 몰랐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61년 7월30일 천왕봉에 올랐던 부산의 '지리산 박사' 김경렬은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 다음날 아침에야 토굴산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때도 토굴산장을 이용한 고객의 대부분은 기복(祈福)을 위해 오른 무속인과 그를 따라온 민초들이었을 것이다.

지리산 산장은 1920년께 노고단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별장 50여 동이 들어선 것이 효시다.
하지만 그것은 등산에 이용할 목적이 아니었다.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여름철만 되면 한국 풍토병인 수인성 질병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궁여지책으로 서늘한 기온의 고지대에서 여름 한 철을 나기 위해 노고단에 별장을 지었던 것이다.
등산 목적의 산장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3년 후인 71년에 처음으로 노고단, 치밭목 등지에 소규모의 단층 건물이 들어섰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못 되어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지리산 등산인구 붐에 편승하여 노고단 등에 현대식 대형 산장을 새로이 지었고, 요즘은 엄청난 돈을 들여 전망대식 화장실까지 만들고 있다.
하지만 성모사가 천년 동안 비바람을 막아왔던 천왕봉에만은 아무런 건물도 세우지 않고 있다. 아니, 텐트조차 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천왕봉을 사람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까? 물론 아니다. 이 천왕봉에도 산악인을 위한 정규 산장이 지난 1940년에 완벽한 구조로 세워졌다.

필자는 졸저 <지리산 365일>을 쓰고 있던 지난 89년 로타리산장 조재영 관리인으로부터 천왕봉 산장 사진을 입수했다.
'지리산 상봉 산소옥(山小屋)'이라 새겨져 있는 이 사진은 10여평 크기로 남쪽에 세 칸의 창이 나있고, 지붕 위에 커다란 판자를 세 겹으로 눌러 바람을 이길 수 있게 해놓았다.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도 담긴 이 사진을 손수 촬영한 덕산(德山)의 이두기옹은 함양의 한 유지가 등산객들을 위해 사재를 희사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일제시대에 천왕봉에 본격 산장이 들어섰던 것이다. 지리산에 게이오대학 등의 연습림까지 조성했던 일본인들의 지독한 침략 근성이 천왕봉 산장 건립을 강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들은 또 일본의 지존 천황(天皇)과 대비되는 천왕봉이란 이름이 못마땅하여 상봉(上峰)이란 이름으로 고쳐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지금은 천왕봉에 사당도 산장도 없다. 하늘과 신(神), 그리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영역일 뿐인 영봉에 사람의 집이 들어설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옮긴 글>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변천사

 

 

 

 1960년대 지리산 상봉 산소옥(山小屋) 모습

1940년대에 세워진 최초의 등산인을 위한 산장이라 합니다

 

 

 

 

1965년6월... 천왕봉 아래  소옥(小屋)이 그럴 듯 합니다

 

 

 

 

 

곡괭이로 파는걸 보니 60년대만 해도 천왕봉 정상에는 흙이 많았나 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리 인간들이 밟았으까 이제는 흙하나 볼수없는 곳

 

 

 

 

아마도 81년까지 지리산 천왕봉을 지킨 표지석이겠죠

앞면에 천왕봉  후면에는 남명선생의 시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

 

 

 

측면에는 지리산  일명 두류산,방장산 이라 써 있습니다

 

 

 

 

 

 캬~ 흰고무신신고..ㅎㅎ

 

 

 

 

 

 70년대 말쯤엔 한자로 쓴 천왕봉 표지석에

천(天)자의 위쪽이 마모되어 대왕봉(大王峰)이라고 우겨된 어처구니 없던 사연도 있답니다

 

 

 

 

이 천왕봉 표지석은  1982년 5공 실세였던 함양 산청 국회의원이었던 권익현씨가 세웠다 합니다

아래사진의 자 부위가 훼손된걸로 보아 아마도 처음에는 영남인의 기상 으로 만든것 같습니다

 

 

 

 

영남에서 경남으로 또 한국으로...시련을 많이 겪은 표지석이네요

 

 

 

 

 

현재의 표지석

 

 

 

 

 

통일이 되어 백두산 꼭대기에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되다'라는 정상석이 세워지길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