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학이 숨쉬는 인왕산코스에서부터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북악산 코스, 아기자기한 예술이 구석구석 새겨져 있는 낙산코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남산코스까지 제주에 올레길, 지리산에 둘레길이 있다면 서울에는 인왕산-북악산-낙산-남산 을 잇는 18.627km의 한양도성 둘레길인 서울성곽길이 있다.
까치설날...
다시 찾아든 강력한 한파에 고산의 상고대가 그립긴 하나 때가 때인지라 감히 서울을 빠져나간다는게...대신 한양도성 둘레길을 한바퀴 돌아 보기로 한다.해 짧은 동절기라 해지기전에 종주를 마치려면 일찍 서둘러야할 것 같아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06:30)전철역까진 아들이 태워다 줘 편안하게 이동 했는데 목적지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두정거장 남겨두고 멘붕상태에 빠져든다.
목적지가 가까워져 신발끈도 동여매고, 모자며 장갑들을 챙긴 후 카메라의 셋팅상태를 점검하려고 카메라를 찾으니 카메라가 없는게 아닌가.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나왔건지 카메라를 안 가져 온 게다. ㅠㅜ어쩌랴. 을지로4가역에서 내려 다시 빽... 아들한테 전화해서 전철역으로 카메라를 가져다 달라하고...
이래저래 1시간 반이상을 까 먹게 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려 광희문쪽으로 나가는 3번출구까진 머그리도 길기만 하든지...
출구밖으로 나오니 길 건너편에 광희문이 자리하고 있다.
일단 길을 건넌 후 진행을 시계방향으로 할 건지 반대방향으로 할건지를 두고 잠시 고민을 한다.
아무래도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든간에 마지막 구간쯤에선 날이 저물 것 같고.. 그렇다면 차라리 남산에서 일몰이나 어둠을 맞는게 좋지 않을까 하여 시계반대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광희문(09:25) - 흥인지문(09:55) - 낙산공원(11:00) - 혜화문(11:20) - 말바위안내소(12:30) - 숙정문(12:40 )- 청운대(13:00) - 백악마루(13:15) - 창의문(13:30) -
인왕산(14:35) - 서울역사박물관(15:30) - 경희궁(15:45) - 숭례문(16:40) - 남산팔각정(17:45) - 국립극장(18:40) - 광희문(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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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사적 제10호)
193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 천도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서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자(약 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936년 1,2월의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3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서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石城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였다.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명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고, 이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성곽의 골격이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성곽 자체는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1704년,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이 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 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문화재청발행 서울성곽 리플릿에서 내용발췌-
駱山은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 또는 낙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東山에 해당된다.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 내사산의 하나로 풍수리리상 서쪽 우백호 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에 해당된다.
산 전체가 화강암 암반으로 되어있으며, 예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깨끗한 수석과 약수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 산록에 있던 쌍계동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 인왕, 백운, 청학동과 더불어 도성안 5대 명승지로 꼽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의 아우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가 있었고, 이화정과 영조때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 등 많은 정자는 왕족,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東村이씨의 세거지를 비롯하여 조선 초기 청학리 하정 류관이 기거하였고, 후일 지봉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곳인 비우당 등 유적이 많은 곳이다.
허나 일일이 찾아보진 못해 그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광희문(光熙門/사적 제10호)
광희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수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 때 써 붙였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도성 밖으로 빼내기 위해 건설한 조선시대 수문 중 하나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 조성을 추진중인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견된 이간수문이간수문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City은행이 들어서 있는 자리엔 계림극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많은 변화가 된 것 같다.
동대문 운동장(축구장, 야구장)에 있던 조명탑을 각각 한개씩 남겨두어 지난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옛날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봉황기니 황금사자기니 하는 고교야구경기를 보러도 많이 댕겼었는데...
오간수교와 청계천
잠시 포장마차안에 들어가 따끈한 오뎅국물로 빈 속을 달래준다.
근데 오뎅맛은 영 아닐올씨다였다는...
예전엔 동대문 옆 낙산방향 언덕에 '이화여대병원'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서 있네~
서울 도심길을 통과할땐 주로 땅 속으로 댕기다보니 그동안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낸 것 같다.
그럼에도 평화시장과 청계천7가쪽 신평화시장만큼은 아직도 굿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국의 소규모 옷 가게에서 파는 옷들은 대부분 이곳 평화시장표라는 사실. ㅎ
검색을 통해 75년 11월에 촬영한 사진 한장을 발견하고 옮겨왔다.
그래 그땐 설악산과 내장산을 오가는 터미널이 있었지. 그래선지 동대문은 지금도 많은 산악회들의 1차 집결지이기도 하다.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보물 제1호)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동대문을 지나 길을 건너 낙산으로 올라선다.
잠시 암문을 통해 이화마을로 들어가 벽화들을 찾아 이골목 저골목들을 둘러본다.
천사날개벽화가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할텐데 골목길마다 동네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이곳저곳 헤메다 할머니 한분을 만나 만나 여쭤보니 쩌~기로 가라한다. 알려준데로 그쪽으로 가봤는데...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겨~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다시 지나가는 아자씨한테 여쭤보니 이젠 왔던길로 다시 쭈~욱 가면 있다하네그려. ㅠㅜ 알려준데로 다시 가서 찾아보면 이런저런 벽화들은 보이는데 천사날개는 안 보인당께요.
이 짓을 세차례나 반복하다보니 쓸데없이 시간만 품한 것 같아 짜증이 날라한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물어보자 하고... 지나는 학생을 잡고 물으니... 이건 또 먼 소린고?
위치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지금은 지워져 없는걸로 안다고 한다.
집에와서 검색 해 보니...
1박2일 방송이 나간 이 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한다. 많이 찾아온 것 까진 괜찮은데, 그리고 조용히 사진만 찍고 가면 괜찮은데, 동네 주민들에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밤낮 안가리고 와서 동네 시끄럽게 하고, 심지어 속옷차림으로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로인해 작가한테 항의가 들어가고...
결국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벽화를 지우긴 했는데 벽 전체에 도색을 하려다가 사람들이 반성하라는 의미로 날개의 흔적만 지웠다고 한다.
혜화문(동소문)
(광희문에서 혜화문까지 1시간55분 소요/이화마을 투어 포함)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경복궁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칭하였으며, 일명 백악(白岳),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 불리었다.
백악의 이름은 상봉에 조선 초부터 白岳神社가 있었던 데에서 연유되었다. 태조 4년(1395) 12월에 白岳山神에게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고 그 사당을 白岳神社라하였으며, 白岳神社가 있는 산을 백악산이라 하였다.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왔을 때 중종은 경회루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그 자리에서 중종은 주산인 백악산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용경은 북쪽의 백악을 '공극(拱極)'이란 이름을 붙여줬고, 따라서 북악산은 공극산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북악의 남쪽 기숡에는 청와대가 있어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인근인 북악산 일대는 일반인들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나 2007년 4월 이후 전면 개방되었다.
지하도를 건너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와룡공원길로 올라선다.
아침의 도심속 날씨는 제법 춥드니만 낮이 되면서부터 날씨가 포근해져 이곳부터는 겉옷을 벗은채 진행한다.
그래도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와룡공원으로 오르내리는 성곽길 주변엔 단풍나무들이 많아 가을이면 성곽과 함께 어울어져 있는 단풍빛이 보기 좋다.
북악스카이웨이에 팔각정과 아랫쪽으로 삼청각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엔 결혼식을 올리고 공항으로 가기전에 저 곳 팔각정에 들러 신랑신부친구들과 함께 뒤풀이를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랫쪽 삼청각은 70년대 대원각, 청운각과 함께 대표적인 대형 요정이었다.
그 중 삼청각은 북안산 자락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70년대 여야 고위 정치인들의 회동과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 막후 협상장소 등으로 이용되었던 장소이다.
80년대 이후 쇠퇴하여 한때는 건설업체에서 인수하여 고급빌라를 짓고자 했으나 삼청각의 빼어난 입지적 조건과 역사적 의미 등을 고려하여 서울시에서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말바위 안내소부터 창의문까진 군사지역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패찰을 받아 달고 진행하는 구간이다.
짧은 간격으로 CCTV가 수 없이 설치되 있고, 곳곳에 전경들이 경계근무를 하고 있으며 일부 장소를 제외하곤 사진촬영 또한 금지된 구간이기도 하다.
딴 건 몰라도 청와대 뒷산이란 명목하에 사진촬영을 금한하는건 넌센스인 것 같다.
이제 위성으로 개미한마리까지 식별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아직도 북한이 1968년 1.21때처럼 아날로그적이란 생각은 아니겠지?
한번 생각 해 보자. 만약 사진촬영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북악산길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며 "아! 이곳은 경계가 삼엄하구나" 하는 광고효과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역발상은 안되는걸까?
숙정문(肅靖門,/북대문/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성곽 안쪽길을 따르다 저 아래 모퉁이쯤에서 암문을 통해 바깥쪽길을 따라 오르다 다시 안쪽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리하는 이유는 성곽길을 막고 있는 군사시설물때문이란거. 그래봤자 내무시설들이지만...
靑雲臺는 북악산 서울성곽 내에서 가장 조망권이 좋은 곳으로 주변에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어 쉼터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1968년 1월21일 북한 124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른다.
백악의 이름은 상봉에 조선 초부터 白岳神社가 있었던 데에서 연유되었다.
태조 4년(1395) 12월에 白岳山神에게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고 그 사당을 白岳神社라하였으며, 白岳神社가 있는 산을 백악산이라 하였다.
아래 도로는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을 내려선 후 올라설 인왕산이 지척이다.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점심 시간도 지났고 아침을 대신해서 오뎅국물에 오뎅꼬치 두개만 먹고 4시간 넘게 걸었더니 배도 고파오고 해 자하문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가게로 들어가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먹는다.
(혜화문에서 창의문까지 2시간 10분 소요)
인왕산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성곽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도심 속 산이 주는 자연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고,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의문 건너편엔 문학이 숨 쉬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자리하고 있고, 정상 넘어 서대문쪽 산자락엔 조선 태조와 여러 호신신장을 모시고 있는 무속신당인 국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인왕산은 氣가 강한 산으로 알려져 무속신앙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창의문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아랫쪽 자하문길이 나면서 싹뚝 잘려나갔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대표적인 詩碑
이곳도 성곽길 일부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아랫쪽 길로 진행한 후 길을 건너 올라서게 된다.
예전엔 이곳에 경계근무하는 전경이 없었는데 우측에 초소까지 세워져 있고 두명이서 근무하고 있다.
이곳 또한 사진촬영을 단속하고 있다.
아랫쪽(청와대쪽)을 나오게 하지 않고 북악산을 담겠다 하고 사진을 찍은 후 확인을 시켜준다.
머하는 짓들인지...
정상에서 흘러내린 치마바위는 중종과 그의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의 사연이 깃 든 바위이다.
인왕산 정상
기차바위와 북한산 보현봉
안전줄 아래는 치마바위
남산과 태평로 일대 빌딩들
仙바위
인왕산을 내려선 후 부터는 주택골목길을 걷게 되는데 안내 표지판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결국...
이 길이 아닌가벼~ ㅋ
이곳은 경희궁터였는데 언제...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들어가 둘러본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자유관람이다.
이 그림을 보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모습, 그리고 지명이 분명하게 나타내 있는걸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북한산을 두고 삼각산이라고들 하는데 예나지금이나 한결같이 북한동이란 지명이 있는걸로 보면 북한산이란 이름이 더 정당성을 갖는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동여지도에는 어떤 이름으로 표기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담아 비교 해 볼 수 있도록 해 놓아 발길을 잡는다.
경희궁(慶熙宮)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이었다.
1617년(광해군 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년)에 완성 하였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겅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이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승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억사를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승정전 등 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예전 서울고가 자리하고 있을때와 현재 박물관이 들어서 있는곳이 공터일때 와보곤 오늘 처음한 발걸음인데 격세지감마져 느끼게 된다.
이렇게라도 일부나마 경희궁을 복원 해 놓았으니 이걸 다행이라 해야는건지...
승정전
궁궐이라 하기엔 그 모습이 너무 초라 해 보인다.
100여동이 넘는 전각들이 다 없어지고 세동(승정전, 자정전, 태량전)만 복원 해 놓은거라니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일제가 경희궁을 허물고 지은 경성중학교, 행방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있더 자리도 경희궁 터이고, 옆쪽에 있는 역사박물관도 경희궁터이다.
현대건걸이 이땅을 매입하려 했는데 서울시가 이 땅을 사들여 박물관을 지었다 한다.
만약 현대건설이 이 땅을 매입했드라면 뭐가 들어섰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참 다행이란 생각은 드는데 서울시가 이곳에 박물관을 지어 놓은 바람에 경희궁의 복원은 물건너 간 것 같다.
박물관내에 유물도 많고, 좋은 시설이라 할 수 있지만 경희궁을 복원 했드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드는건 나만의 생각일까?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떼어갔던 것을
서울시에서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으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 하였다 한다.
백범 김구선생이 암살당했던 경교장
삼성강북병원을 지으면서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 해 놓았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경교장을 둘러보고 나와 옛 돈의문(서대문)터를 건너 정동길로 들어선다.
이곳도 성곽길 안내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제대로 가고 있는지 모른채 짐작으로 방향만 보고 진행하게 된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원래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의주(義州)로 빠지는 의주대로와 접해 있어 중국 사신은 이 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 다른 문들과 함께 건축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肅靖門),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그 대신 약간 남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1422년(세종 4)에 다시 이 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을 새문안(지금의 신문로)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뒤 숙종 때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현재는 당시 사진을 통해 돌로 쌓은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이 있었고,그 위에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며 주위에 낮은 담이 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원학교
이화여고
서민들 자녀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학교가 되 버렸다.
정동제일교회
나중에 지도를 보니 이곳에서 배재학당쪽으로 진행했어야 하는데 지도도 보지 않고 안내표시도 없고 해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시청앞쪽으로 진행하게 된다.
서울시립미술관
으음~ 냄새 쥑인다~ 추억의 뽑기과자다.
하나 사서 먹고 싶은데 주변에 시선들이 너무 많다. ㅋㅋ
덕수궁 돌담길은 눈이 녹아 흘렀던 물이 오후가 되면서 얼어 있어 걷기다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다.
저 아가씨는 용감하게 차도를 따라 걷는다.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서울특별시청
아무리 봐도 예전건물과 함께 있는 모양새가 영~ 언발란스 해 보인다. 새 청사의 모양새도 썩 맘에들게 보이지도 않고...
22년동안 청춘을 바치면서 삶의 버팀목으로 삼았던 곳이다.
숭례문(崇禮門/남대문/국보 제1호)
조선시대 서울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4년(1395)부터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으나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풍수지리설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종 29년(1447)년에 개축하였다.
그 뒤 문루가 기울어 성종 10년(1479)에 다시 개축하였다. 원래 기단 양쪽은 한성의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도로를 내면서 헐어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장중한 겉모습과 견실한 내부 구조에서 성문으로서의 당당한 면모가 엿보인다. 또한 전형적인 다포식 건축물로 15세기의 목조건축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으며, 현재 복구공사중이다.
당시 처참했던 모습
창의문에서 숭례문까지 2시간 45분 소요
이제 복원이 거의 되 가는 것 같다.
수선전도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데 왠 홍화문? 혜화문을 잘 못 표기 해 놓았다.
관계 되시는분들 제대로 좀 하시지요.
서울에 살면서 남산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허나 서울에 살면서 남산을 몇번 올라봤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막상 서울에 살면서도 남산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게 사실일지 모르겠다.
나만해도 남산을 찾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다섯손가락이 다 굽혀지지 않으니 말이다.
나만 그런건가?
남산공원쪽으로 이어지는 성곽도 복원 해 놓았다.
백범광장
건립당시엔 어린이회관였는데 현재는 서울특별시 교육정보원이 들어 서 있다.
백범 김구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
남산 분수대
아~ 이곳을 얼마만에 와 보는건지... 족히 30년은 넘은 것 같다.
남산은 일곱살때 어머니와 셋째누나랑 왔던게 처음였던 것 같다.
잠시 쉼을 하면서 보리차와 쿠키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주구장창 정상까지 이어진 계단길을 따라 오른다.
남산에선 N타워 말고는 사대문 안을 조망하기엔 이곳만한 곳이 없다.
어느새 하루해가 뉘엇뉘엇 져 가고 있다.(17:37)
남산을 찾은 사람 80%는 외국 관광객들인 것 같다.
다들 안 찢어지고 잘들 살고 있을까...
17:53
투어버스인 전기차와 뒤에 외국인 관광객들을 싣고 온 관광버스들이 여러대 주차 해 있다.
산행길과 다른 길을 오래 걸었드니만 사타구니가 콕콕 쑤시는게 여간 아픈게 아니다.
잠시 쉼을 하면서...
N타워에 조명이 밝혀지기 시작한다.(18:12)
(18:17)
성곽으로 이어진 곳에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시설물이 자리하고 있어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국립극장으로 내려선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성곽길에 대한 안내표지판은 보이지 않고...
도로를 따라 내려서다보니 호텔신라 못미쳐에 언덕으로 이어진 것 같은 작은 골목이 보여 무단횡단을 해서 골목길을 따라 올라서니 성곽 암문이 나온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암문쪽엔 안내표지판이 있어 광희문에서 남산으로 진행할땐 헤매진 않겠지만 암문 아랫쪽 골목 입구쪽엔 이렇다 할 안내표시가 전혀 없어 제대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광희문을 출발하여 낙산-북악산-인왕산-남산을 거쳐 다시 광희문으로 돌아와, 10시간 가까운 서울성곽길 종주를 마친다.(19:20)
(숭례문에서 광희문까지 2시간 40분 소요)
종주를 마치고 GPS를 보니 진행거리가 무려 27km가 넘게 나온다. 서울성곽거리가 약18.2km라는데 실제 걸은 거리와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성곽이 없어진 도심길과 낙산에서 잠시 이화마을로 들어가 이곳저곳 돌아보고, 남산에서 성곽길이 아닌 순환도로를 따라 진행했다지만 이건 차이가 나도 너무 큰 차이 아닌가? (제외시 약24.5km)
gps로 측정된 거리가 잘 못 된건 아닐거구...
아마도 18.2km란 거리는 성곽길을 실측한 거리는 아닌 것 같고, 옛 문헌에 나와있는 거리를 그대로 인용하다 보니 그런게 아닌가 싶다.
하기야 일일이 자로 잰 거린데 오죽하겠는가. 또한 그 일을 한 누군가가 곧이곧대로 정직하게 쟀을리도 만무하고..
무튼,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구경하기 힘든게 현실인데 다리는 아팠지만 간만에 서울구경 한번 잘 했던 하루였다.
한가지 관계기관에 대한 바램이 있다면 성곽이 없어진 도심, 특히 골목길 같은 곳에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정표를 잘 갖춰 놓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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