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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여기저기

【12.11.11(일)】광해의 아픔 간직한 왕궁, 창덕궁 가을 이야기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조선 왕실의 비밀 정원이 있다.

창덕궁 후원, 어느 숲의 가을보다 더 깊고 수려한 가을이 내려앉은 어느 정자에 앉으면 광해와 능양의 이야기도 정조의 굳은 마음도 다 들릴 것만 같다.

아주 오래된 숲은 수백 번의 가을을 맞이하고 보낸 늙은 나무들이 옛날 이야기하듯 속삭일 것 같았다.

 

 

 

 

 

 

광해는 그날을 알고 있었을까?

1623년 3월13일 밤 창과 칼을 움켜 쥔 군사들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 모였다. 이들은 능양군(훗날 인조)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궁궐 안에는 이미 능양군의 군대와 내통한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돈화문을 열어주었다. 군사들이 밀물처럼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돌보던 선정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 등 궁궐 안 대부분 건물은 화마에 휩싸였다.

왕은 그 무렵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밤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능양군의 군대가 궁궐을 휩쓸고 다니는 사이 왕은 궁궐을 버리고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해 있었다. 주인이 버리고 간 창덕궁은 이미 새로운 주인인 능양군의 손에 넘어갔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거대한 회화나무 네그루가 서 있고 금천교 건너에도 몇 그루가 더 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창덕궁 자료에 따르면 나무 수령을 300~400년 정도로 추정한다.

광해군이 재건한 창덕궁에 심은 어린 나무가 지금처럼 자랐을 수도 있는 일이다.

 

 

 

 

 

 

 

 

 

 

 

 

금천교와 진선문

 

 

 

 

 

 

금천교를 건너 '왕에게 바른 말을 아뢰어 국정을 올바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깃든 진선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이 보인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위압적이면서도 자상한, 합리적인 자유, 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인정전

 

 

임진왜란 때 불탄 창덕궁을 다시 짓고 그 바탕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왕은 그의 조카인 능양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사실 광해군은 능양군이 군사를 일으켜 자신을 왕의 자리에서 내몰려고 하는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 전에도 자신의 자리를 노린 여러 역모 사건이 있었고 이번 일도 사전에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전에 그랬듯이 사전에 역모를 밝혀 관련된 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내지 않았다. 역모 당일 밤이 되도록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생각하건대 광해군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최후의 만찬을 즐겼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정파 간 세력 싸움에서 무기력하게 희생된 것은 아닐까?

 

능양군은 조선 16대 왕, 인조가 됐다.

 

 

 

 

 


창덕궁, 광해의 꿈을 세우다

조선조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이는 연산군과 광해군 2명이다. 노산군도 그 중 한명이었으나 노산군은 후에 복위되어 단종의 칭호를 받았다.
이들 중 광해군(1575~16341)은 인조반정으로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병자호란 후인 인조 15년(1637) 4월에 제주도로 옮겨져 67세를 일기로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다.

선조 말기 광해군은 세자 시절부터 창덕궁을 다시 지으며 왕권 강화와 새로운 조선 건설을 다짐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됐다.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진행했다.

그는 효자였다. 아버지 선조가 병으로 누워 있는 사이 광해군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 옆을 지켰다. 선조 또한 그런 광해군을 의지했는지 병이 위독해 지자 광해군을 불러 옆에 있게 했다.
그러던 중에도 광해군은 전쟁 때 불탄 창덕궁을 차근차근 다시 짓고 있었다. 선조의 병은 점점 악화되다가 결국 1608년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이 왕에 오르면서 창덕궁도 새롭게 문을 열었고 조선의 정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사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소실됐으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중건했다. 창덕궁은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거쳐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해군 집권 당시 외국 정세는 명나라의 국운이 쇠약해지면서 동시에 여진족(후금, 이후 청나라) 세력이 무섭게 일어났다. 명나라는 광해군에게 후금과 싸울 군대를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외교 전술의 지략을 펼치게 된다.

 

 

 

 

 

명나라에 1만 군대를 파견하는 이를 이끄는 장수에게 전투 도중 후금에 투항하라는 것이었다. 조선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명나라에게는 그 동안의 의리를 지키면서도 당시 최강이었던 후금의 조선 침략 계획을 화친으로 사전에 방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일은 광해군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후금은 물론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와도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고 무역의 길을 열고자 했다.
또한 광해군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국토를 재건하고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는 일에 매진했다. 그 중 하나가 경기도 지역에 실시한 대동법이다.

 

 

 

 

 

대동법이란 그동안 중앙정부 및 지방관아로 납부하던 온갖 공물과 진상품, 납세품 등을 쌀로 통일한 것이다. 토지 1결에 일정량씩의 쌀을 징수했다. 그 쌀을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 배분해 필요한 물품을 민간 시장에서 사게 했다. 농민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환영했다. 경기도에서 시범 운영하던 대동법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능양군이 창덕궁을 장악하고 스스로 새 임금이 된 그 해까지 광해군이 왕으로 산 세월은 15년. 그 세월 동안 광해군의 새로운 조선 건설의 꿈을 함께 한 곳이 창덕궁이었다.

 

 

 

효성 지극했던 광해를 보는 것 같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창덕궁 후원은 왕실의 정원이었다. 왕의 휴식 공간이자 왕실의 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을 격려하고자 술과 음식을 내고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왕은 후원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정자나 건물을 지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100여 개나 됐다고 한다.

 

 

 

 

 

 

 

 

 

 

 

 

 

후원관람은 1시간 간격으로 가이드와 하께 입장을 하게된다.

작년엔 가이드와 동행을 하든 개별 관람을 하든 선택관람을 할 수 있었는데 올핸 온리 가이드와 동행뿐이다.

대신 작년과는 달리  올핸 옥류천까지 관람코스를 연장 해 놓았다.

관람시간은 1시간30분(14:00~15:30)

 

 

 

 

 

 

 

 

 

 

 

 

 

 

 

 

 

 

 

 

 

 

 

 

 

 

 

 

 

 

 

후원에서 처음 여행자를 맞이하는 것은 부용지와 주합루다. 약 300평 정도 되는 연못 주변에 몇 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연못 바로 옆 작은 건물은 만개한 연꽃을 닮았다고 하는 부용정이다.
부용정 맞은편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 주합루이다. 주합루는 아래로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으며 좌우로 서향각과 천석정 등의 건물을 거느렸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와서 정문인 어수문을 통과하면 부용지가 나온다. 주합루는 부용지 일대의 건물을 거느리고 풍경의 중심점이 된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그 해에 완공됐다. 정조는 붕당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품은 군주다.

붕당의 정치싸움에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혁신하려는 정조의 뜻이 담긴 곳이 주합루였다.
주합루에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이 있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 잠깐 설립됐다가 폐지 된 적이 있었는데 정조는 즉위년에 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각은 궁궐 안팎 여러 곳에 설치 됐으며 주합루에는 어필과 인장, 도서 등을 보관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기능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고 규장각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발굴 육성했다.

그들이 정조의 친위세력이 됐던 것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왕만 드나들 수 있었다.

신하들은 그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는데 머리를 숙이지 않고서는 출입할 수 없는 구조다. 아마도 왕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연못이다. 사각형의 연못은 땅을 의미하며,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부용정은 사방으로 지붕이 돌출된 열 십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부용정과 주합루 사이 연못 앞에 있는 건물은 영화당으로 그 앞뜰인 춘당대에서 열리는 문무의 과거를 임금이 직접 주관하기도 했던 곳이다.

 

 

 

 

 

 

 

 

 

 

 

 

 

 

 

 

 

 

 

 

애련지는 숙종이 좋아했던 곳이다.

연못 주변 단풍이 다른 곳보다 진하게 들었다. 돌담과 기와 정자와 연못이 단풍과 어울렸다.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은 연못 옆 정자에 '애련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애련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고,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세워졌다.

'애련'이란 군자의 덕으로 상징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연경당

원래 이 집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조 28년(1828)에 지어 졌다.

 

 

 

 

 

안채

 

 

 

 

 

 

이쁘게 생긴 처자가 재밌게 해설을 해 주는데 난 그 해설을 들을 시간이 읍따. ㅎ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사랑채 뒷쪽

이 집은 대궐에 있으면서도 단청이 되어 있지 않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로 남녀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 집을 연상 시킨다.

하지만 부부사이에 밤까지 갈라 놓을 수 있겠는가.

사랑채 뒷쪽 툇마루는 안채로 이어져 있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문을 만들어 놓고 왕비의 품이 그리울때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연경당 뒷뜰을 나와...

 

 

 

 

 

 

애련지를 지나 연경당 뒷뜰을 나서면 정조의 글귀가 남아 있는 존덕정이 나온다.

 

 

 

 

 

 

 

 

 

하늘의 달은 오직 하나다

정치 혁신과 왕권 강화를 위한 정조의 '촌철살인'은 존덕정 정자에 남아 있다.

존덕정은 인조 때 지어졌다.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호를 짓고 그 서문을 새겨 존덕정에 걸었다. 그 뜻은 '세상 모든 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로 해석할 수 있는 데 그 속에는 '하늘에 달은 하나이되 그 달이 비치는 세상의 모든 냇물에도 하나 씩 달이 있으니 왕의 마음이 천하에 닿아 있는 것과 같다.

이렇듯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는 데 신하들도 왕의 뜻을 따라 그 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 모든 개울이 달빛을 받아 빛나지만 하늘의 달은 오직 나 하나다. 따라서 신하들은 내 뜻을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존덕정을 지나 옥류천으로 향한다. 숲이 울창하다. 도심 한 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 숲 깊은 곳에 있는 옥류천 일원은 후원에서도 숨은 정원이다.

 

 

 

 

 

취한정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바위와 나무가 풍경을 이루는 그곳에 태극정, 취한정, 농산정, 청의정, 소요정 등 다섯 개의 정자와 건물이 들어서 있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 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곡선을 그리며 굽어 돌아가는 물길 한 쪽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비밀의 숲, 후원. 그 안에 숨은 정원 옥류천의 가을이 가을답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애련지의 단풍을 한 번 더 보고 계단을 올라서서 길을 따르면 구 선원전과 창덕궁 돌담 사잇길이 나온다.
궁궐의 가을 속에서 다시 현세로 걸어 나간다.

 

 

 

 

 

세월의 무게감 만큼이나 창덕궁의 영화와 오욕도 모두 다 품고 있을 것만 같다.

 

 

 

 

 

 

후원 산책의 여운을 품은채 관람을 마무리 할 즈음 좌측에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쇠파이프 지지대의 부축을 받고 서 있다.

천연기념물 194호로 지정되어 있는 750년 된 향나무다.

근데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2010년 9월 2일 새벽 서울을 휩쓸고 간 태풍 곤파스에 의해  주 가지가 부러졌다 한다. 

 

 

 

2007년때의 모습은 이랬었다.

 

 

 

 

 

 

향나무가 기백년이 넘으면 원숭이가 되고 천년이 넘으면 용이 된다고 한다.

아직 천년이 되지 않아 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땅에 닿은 줄기 끝에 원숭이의 모습이 보인다.

 

 

 

 

 

궁궐안 가을 속에서 다시 현세로 걸어 나간다.

아직 궁궐안은 가을이 한창이던데 현세는 겨울이 가까워져오는지 춥다.

몸도...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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